슬픔의 변두리
책이든 영화든 마치 나를 위해 쓰인 것 같은 운명적인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전형적인 오만이지만 그 ‘기분’이란 것이 나를 깊이 충족시켜 온 것에는 이견이 없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그들이 찾아온 것 같은 착각의 연속은 사람을 계속 살게 만들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좀 더 나아가면 나를 보여주기 위해 저 너머의 무언가를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욕망을 필히 만난다. 담백하게 이거 좋다고 말하면 끝날 것을 구구절절하게 입이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며 한마디.
그게 중요한가? 아니.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오늘도 헛소리를 했구나, 버스 차창에 머리를 처박으며 늘 후회한다. 하지만 이 견고하고 아름다운 함정에 어떻게 중독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표현하는 만큼 타인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 나를 나만이 알고 있고, 모두가 그것을 궁금해한다는 착각을 버리는 게 쉽지 않다.
미미하게 남은 감정들을 책장 속 낡은 동화책들처럼 둔다. 슬픔은 그 옆에 붙박이 가구처럼 자리 잡고 있다. 매번 에둘러 표현하는 슬픔과 우울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아름다운 자기 연민의 세계를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을까. 그것들이 이제는 나와 딱 붙어버렸기 때문일까,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서일까. 건강하고 생생한 모습을 시연하는 게 익숙해졌음에도 그 슬픔을 자주 떠올린다. 우울에 가득 잠겨 나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여전히 공감하면서도 그 순수한 슬픔이 내게만 크다는 걸 안다. 나의 슬픔이 세상의 중심이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슬프지 않고, 슬픔을 모르고 살고 싶지는 않다.
슬픔과 우울. 완전히 다른 두 감정에 인생의 일부를 저당 잡힌 기분을 느낀다. 상태가 안 좋은 날일수록 선명해지는 것들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를 않는다. 여전히 악몽을 꾸는 레퍼토리도, 생각의 방식도 지독하게 바뀌지 않는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마음을 간직하는 관성이 부끄럽다. 차라리 기억나지 않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오래된 동화책 중 한 권을 펼친다.
옛날 옛적에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꽃이 피고 지고, 나무가 자라고, 잎사귀의 색이 바뀌고, 눈이 몇 번씩 내리는 동안 작은 집 주변은 빼곡히 도시가 되었습니다. 풍요로운 자연을 등지고, 매연과 사람들 사이에 있던 작은 집을 한 주인이 발견했습니다. 옛 주인의 손주였습니다. 작은 집은 뿌리째 뽑혀 옮겨졌습니다. 옮겨진 곳은 그 옛날처럼 푸른 언덕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작은 집은 행복해졌답니다.
모든 게 변해도 작은 집은 내내 그대로 있다. 프레임의 가장 가운데를 차지하는 주인공의 운명이란 역경과 관심을 동시에 받는다. 이 책이 전달하고 싶은 교훈이 어떤 것이었든 작은 집 이야기는 내게 다르게 읽힌다. 세상의 중심에 늘 뿌리 박혀 있을 수 있는 완결성을 부러워한다. 동시에 그 지리멸렬함을 느낀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일에 환멸을 느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설명하는 순간 종종 꿰뚫린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나도 모르는 모습을 콕 집어 찾아내는 사람들에게 기시감을 느낀다. 관찰자 시점에서는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어쩌면 자의식 과잉은 내가 아니어야 벗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늘 나다움의 선명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의식 과잉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짝꿍이다.
그렇지만 삶에서 중심을 빼앗기지 않는 게 곧 나만의 심상을 유지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두리에 서 있을 필요가 있다. 프레임의 바깥쪽에서 나의 세계를 지켜보는 일들이, 적당한 무책임과 유체 이탈 사고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타인과는 좀 더 가까워지고 스스로와는 살짝 멀어지는 이 거리. 가장자리에 둥글게 서기만 해도 생기는 숨구멍이 좋다.
S와 동해에서 보낸 시간이 떠오른다. 스무 살의 우리는 동상이몽의 마음으로 매번 같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우린 누군가가 우울의 눈으로 들어가면 그가 변두리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서성거렸다. 그때 서로의 슬픔을 정확히 설명해 주는 건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슬픔의 변두리에서는 같이 있어 주기만 해도 해결되는 것이 있었다. 그중에는 말끔히 잊힌 것도 있고, 여전히 발목을 잡는 것들도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슬픔의 기운이 느껴지면 나는 여전히 그를 걱정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무게로 대견함을 느낀다. 우리가 같고도 다른 시간을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우리의 삶이 계속 달라져도 서로의 슬픔 곁을 지킨 시간은 동해 여행이라는 단어로 단번에 축약할 수 있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을 믿을 수 있다.
작은 집은 뿌리째 뽑혀 옮겨지지만, 내 인생에 그런 극적인 이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마음속 가구들을 옮겨 본다. 중심을 비우고 변두리로 자리를 옮긴다. 나를 성글게 설명하고 조금은 오해받기로 마음먹는 순간, 더 자유로워진다.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즐기는 마음이 있다.
하자글방 3주차 글감 '자의식 과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