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를 잘 먹는 법
매일 아침 이불 속에서 대충 굴러 나와 옷을 껴입고, 가방을 메고, 현관에 걸어둔 지갑과 이어폰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문을 나서며 주머니에 넣어둔 토마토를 손에 쥐고 건널목을 향해 달린다. 역까지 걸어가는 십분 남짓 과육이 옷에 묻지 않게 몸을 앞으로 내빼고 토마토를 먹는 일은 나만의 의식이다. 성실하게 실패를 쌓는 하루를 위해서 이 의식은 중요하다. 한 방울의 물기도 없이 깔끔하게 토마토를 먹는 순간, 하루를 성공적으로 시작했다고 속으로 으쓱거린다.
토마토를 잘 먹기 위해서 나름의 방법이 있다. 토마토의 꼭지를 아래쪽으로 하여 가장 높이 솟아있는 부분을 작게 베어 문다. 과육이 가득 찬 토마토는 아삭아삭 씹어 먹기 좋지만, 축축한 과즙이 가득한 토마토는 관찰이 필요하다. 사이에 고여있는 과즙이 찰랑거리는 모습이 확실히 보일 때까지 한 입 한 입 신중하게 내부를 살핀다. 입이 콱 닫힐 때까지 이빨을 하나씩 눌러야 하는 악어 게임을 할 때처럼 조심스러워야 한다. 한쪽만 베어먹은 토마토의 과즙은 최대한 마셔서 처리한다. 과육만 남은 토마토를. 풋내가 나는 꼭지 부분만 남을 때까지, 이 붉은 과일이 손톱보다도 작아질 때까지 신속하게 씹어 먹는다.
내게 토마토는 엄마의 채소다. 그녀에게 길러지는 내내 냉장고 맨 위 칸에는 주스라기엔 성긴 토마토 과육들이, 으적으적 씹히는 그 액체가 갖가지 통에 담겨 있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몇 번씩 마셔 버릇 한 덕분에 내게 토마토라는 채소의 원형은 둥글둥글하고 단단한 형태가 아니라 통에 담겨 있는 유동적인 모습이다. 그냥 토마토를 잘라서 믹서기에 간 것뿐인 그 주스는 누구나 해도 그 맛이 난다. 그러니 그 습관의 맛이 그리울 때면 당연히 내가 해 먹어도 되지만 나는 꽤 당당한 태도로 엄마에게 토마토 주스를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녀가 해주는 칼칼한 된장찌개나 체에 걸러 부드럽게 쪄낸 계란찜을 해달라 하는 것보다 여전히 내게 그 손맛이 필요하다는 걸 가볍게 드러내고 싶어 그런다.
동시에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원가족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싶은 욕망은 그리움보다 커진다. 왜 엄마 친구들의 자식들은 효자이거나, 손이 많이 가더라도 나름의 방식으로 보듬어지고 있는 걸까. 왜 세상에 흉흉한 일들이 많아서, 그녀가 내 일과와 위치를 궁금해 미치도록 하는 걸까. 엄마가 당신의 믿음대로 내가 잘 해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다는 걸 그저 믿어줬으면 싶다가도, 가끔 내 삶의 박자에 엇박자를 놓으며 문을 두드리는 그녀가 야속하다.
가끔은 뭘 먹었고, 언제 들어왔고,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조잘대는 역할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숨 쉴 때마다 크게 들썩이는 그녀의 등에 귀를 대고 잠에 들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 가끔은 그녀를 영원히 경악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으면서 막상 만날 때면 완충재를 겹겹이 쌓아두고 그녀가 모를 만큼 조금씩 밀어낸다.
유치원을 다닐 때쯤이었다. 이맘때처럼 초겨울을 기다리는 주말 아침이었고, 청소기를 미는 엄마를 따라 깨끗한 바닥을 돌아다니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 기다리던 참이었다. 물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아이 걸음으로도 금세 돌아다닐 수 있는 마을 곳곳이었지만, 집에서 책을 읽거나 티비를 보는 것 말고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있었으면 바라게 되는 맑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은 청소기 소리로 가려지지 않는 어른들의 언쟁이 이어졌다. 엄마가 오천 원을 손에 쥐여주고 외출을 하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쥐어진 지폐가 불안을 더 자극했다. 마음을 잠재우며 얼마 전 문을 연 동네 편의점으로 갔다. 그 와중에 피자 호빵을 먹어보고 싶었다. 배를 채우고 도착한 주말 오후의 놀이터는 아무도 없었고 오빠와 나는 풀숲을 헤치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을 나간 줄 알았던 엄마는 감쪽같이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그날 엄마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하다. 매일 토마토를 갈아주던 엄마와 어느 날 훌쩍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엄마를 너무 오래 곱씹은 나머지, 어디서부터가 나의 상상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당시의 그녀가 지금의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그날의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엄마에게 토마토 주스는 그저 채소를 먹이려는 습관이었고, 그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였을 것이다. 그 사실이 때로는 서운하다. 이십여 년간 서로의 명암을 샅샅이 관찰해 온 우리조차 서로를 곡해한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화장실 창문, 베란다 창문, 방 창문을 걸어 잠그고 손바닥만 한 전구를 켠 채 누워 생각한다. 바퀴벌레의 걸음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진공 상태에 누워 있다. 매일 아침 토마토를 깔끔하게 씹어 먹으며 생각한다. 사실 엄마는 잘 지내고 있다고, 너나 잘하라고 매섭게 조언한다. 엄마는 궤도에 오르는 순간 금세 멀어지는 사람이고, 나는 비슷한 하늘길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골몰하는 사람이라는 차이를 알면서도 그렇다. 어쩌면 엄마가 나를 걱정하는 이유는 토마토를 씹는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도록 곱씹는 나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엄마를 상상해 본다. 분명 울기 시작해서 한 시간쯤 흐르면 괜찮아질 것이다. 괜찮다마다. 그러고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웃을 것이다. 엄마는 슬픔도 분노도 회한도 금세 아득하게 잊어버리는 사람이니 확신한다. 그녀가 그래 주는 덕분에 나는 우리의 다름이 얼마나 다른지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나의 욕망은 단순하고 원초적이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멀어지고 싶다. 삶의 단독자로 꿋꿋이 서 있고 싶다. 밥을 차려 먹을 때 엄마가 무얼 먹었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싶고, 엄마에게 토마토 주스를 갈아 달라고 하지 않고 싶고, 습관적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싶지 않다. 친구들과 그러하듯, 그저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 안다면 충분히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싶다.
토마토를 그만 신중하게 먹고 싶다. 조심하지 않으면 금세 손등을 타고 소매를 은근히 물들이는 토마토즙을 티셔츠 자락에 대충 닦아내고 하루를 살고 싶다. 나만이 아니라 엄마에게도 의미 있는 무언가를 알고 싶다.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초겨울의 하루를 그녀처럼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다. 낯선 곳에 있는 엄마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