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슬픔의 모양은
인경의 허벅지 바깥쪽에는 넓은 튼살 자국이 있다. 얕고 넓은 골자가 죽죽 그어진 문양은 동물에게 긁힌 흉터 같기도, 나무 껍질 같기도 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허벅지를 유심히 바라본다. 본래 피부보다 밝아서 더 선명하게 보이는 튼살이 눈이 거슬리는지 한참을 만지작거린다. 인경은 침잠의 시간을 보내면서 무언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슬픔을 다른 슬픔으로 덮어버릴 날을 기대했다. 하지만 튼살이 생기고 나서는 이미 모든 슬픔이 몸에 체화되어서 어떤 식으로든 하나를 내어주어야만 그 시간을 통과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인경은 계속 읇조리며 얕은 언덕을 넘었다. 흉터가 되라... 흉터가 되라... 언덕을 오르다 토기가 차오르자 인경이 길 한복판에 빈 속을 게워냈다. 방금 먹은 종합 비타민이 문제였다. 철분이 부족하다면서 철분을 뱉어내는 몸에 입가를 짜증스럽게 닦았다. 사람들이 인경을 과음한 청년으로 보며 슬슬 피해갔다. 노랗고 찰박거리는 토사물을 씻어내며, 툭툭 떨어지는 눈물 방울을 들키지 않으려는 인경이 무신경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해보려던 그의 다짐은 금세 끝났다. 다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낮잠을 밤잠처럼 잤다. 자면 잘수록 머리는 깨질 것 같았지만 눈을 떠서 드는 생각은 더 괴로워서 인경은 계속 잤다.
이후로도 인경은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곧 머리가 깨지지 않게 쓰러지는 법을 익혔다. 식은땀이 흐르고 어지러운 기운이 들면 체면 같은 건 안중에 없이 지하철역에서, 길가에서, 일터에서 쉽게 쉽게 누웠다. 한 번 쓰러질 때면 눈앞이 새까매졌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인경은 그때마다 골을 댕댕 울리는 어떤 슬픔이 몸속 염증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타인에게 받은 분노와 질투와 슬픔, 그 외의 걸러지지 않은 찌꺼기를 데리고 오래 견뎠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원한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향하는 동안 인경은 그러지 못했다. 슬픔이 분노로 치환되는 시간이 지나 주변을 살펴보았을 때는 모두가 떠난 후였다. 뙤약볕에 수영장 바닥이 달궈지는 속도만큼 지지부진한 분노를 털 곳이 없어 그는 매일매일 쓰러졌다. 이미 모든 것은 지난 일이 되어서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파란 땡땡이 핸드크림을 잔뜩 바르던 선생님은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원하면 도와줄 수 있어.” 도움을 청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조각내는 방법을 전수 한다. 하지만 인경의 얼굴은 어떤 표정 없이 창백하게, 다소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한다. 핸드크림이 다시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니, 응?” 다정한 말투와 상반되게 표정은 살짝의 불안과 지겨움이 맺혀있다. 인경에게 그 표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길 기대하는 표정 정도로 읽혀서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길 다짐한다. 속에서 차오르고 있는 무언가를 꾹꾹 눌러내 결국 삼키고 만다. 처음에야 그 역함이 느껴지지 않지만, 점점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인경은 그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후려치던 회초리가 부러지자, 스스로 다른 막대기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주는 형벌로써 침묵을 지키고 자신의 인생을 막다른 길로 인도하기로 했다.
이후로 인경은 슬픔에 중독되었다. 방구석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알 수 있었다. 어두움이란 건 너무 아름답고 매혹적이라 벗어나도 금방 생각난다는 걸. 왠지 어둠 속 자신만이 진짜 같다는 생각에 다시 자리를 찾아 가게 되는 이상한 귀소본능이 생겼다. 그것이 그저 사건 이후 또 다른 모습으로 거듭난 것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가 사건은 그 일이 있었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인경에게는 사건이 있었다. 대단한 괴롭힘은 아니었다. 오래전에도 나쁜 애들은 있었지만 그냥 이번에는 달랐다. 몇 달 동안 조금씩 강도를 더해가던 괴롭힘은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한 달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들 앞에서 땀을 삐질 거리며 말하고 나면 그 말의 꼬투리를 잡는 시간이 그만큼 이어졌다. 친구들도 어른들도 인경에게 일어나는 폭력을 막아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이 일이 아주 큰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경도 마찬가지였다. 지나고 나면 곧 다른 슬픔으로 덮일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자기 몸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반복적으로 뜨거운 물에 담가지는 이 루틴이 자신을 망가뜨린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더한 일도 많았는데 왜 이런 일에 마음이 박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심상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인경은 점점 화장실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고, 읽을 수 있는 글이 짧아졌다.
어른이 되면, 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건은 인경을 제외한 모두에게 지난 일이 되었고, 인경은 홀로 남아 모두의 찌꺼기를 닦았다. 십 대부터 끌고 온 슬픔과 그 슬픔을 끌고 왔다는 슬픔, 다음 10년을 책임질 슬픔. 다채롭게 죽고 싶은 슬픔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들이 그의 삶의 필수 불가결인 것이 된 것을 정신건강 전문의가 진단하고, 의사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며 착잡함을 느끼는 것도 모두 인경의 몫이었다.
인경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괴롭힘에 정당성을 부여해 보기도 하고, 타인이 말하는 그 시간을 들어보기도 하고, 과거를 무수히 반복하며 자책했다. 결국 이 모든 게 변명 같아 결국 그 시간을 지나오지 못했다고. 살갗이 터지고 번지는 자국을 몸에 남기면서, 한동안 뜯어낸 엄지발톱이 없는 채로 살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지만 하고 싶었다. 그 사이에 긴 시차가 있다고 해도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폭력에 둔감해지고 얌전히 순응했음에도, 세상의 구차함에도 변명이 더 구차함을 알고 있어서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인경은 여전히 꿈꾼다. 가슴께까지 차오르는 진흙 속으로 삼켜지거나, 강당에 홀로 갇히거나 변기통에 앉아 비극이 주는 전이를 온몸으로 견디거나…. 그런 종류의 뻔하고 구차한 꿈을 여전히 꾼다.
졸업할 무렵, 인경은 단식 자살한 시인의 시집을 선물 받았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끝내 품은 시간 동안 이해되지도 않는 그 시들을 수백 번 읽으려 시도했다. 단문들의 합성조차 이해할 수 없는 뇌를 한탄하며 어른이 되었다. 그 시집조차 까먹어버린 어느 날, 오랜만에 책장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꺼내 읽은 시에서 무언가 쏟아져 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마침내 시집으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알아냈다.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고 싶은 그 마음이 인경에게 닿기까지 한세월이 흘렀다. 인경은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수십 번 다시 시를 읽었다. 창백하고 심드렁한 표정 위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
막대로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 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 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올라브 하우게
그가 잃어버린 것과 얻은 것을 계산해 보면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 기쁨은 잃어버리고 슬픔과 흉터를 얻는 손해뿐인 장사. 모든 생을 걸고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일을,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일을 인경은 해냈다. 결국 길고 긴 터널을 스스로 굴러 나왔다.
무언가를 새겨야만 어떤 시기를 건너올 수 있다면 슬픔이 인경에게 남긴 모양은 허연 나무껍질 모양이다. 허벅지의 튼살은 부러 새긴 타투처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인경은 자신의 알몸을 유심히 바라본다. 크림을 바르고 오일로 열심히 문질러도 돌아가지 않는 허벅지 위 갈라지고 찢어진 듯한 자국을 긁는다. 양쪽으로 쫙 늘려보기도 모아본다. 흰 무늬가 더 도드라진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인경은 여전히 긴 바지를 입고 집을 나선다.
하자글방 8주차 글감 '숨은그림찾기'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