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둘, 하나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내게 엄마는 영희와 해영, 두 사람이다. 생물학적 엄마인 영희와 그 동생 해영, 그리고 나의 모양은 인생에서 최초로 보고 배운 삼각형의 관계다. 유년 시절은 아파트 앞 동인 우리 집과 뒷동인 해영의 집을 번갈아 가며 보냈다. 영희가 아픈 날에는 뒷동에서 밥을 먹고 한참 놀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해영은 아픈 언니를 위해 근처로 이사 오고 마는 사람이었고, 그 자식을 내 새끼처럼 먹이고 재우는 사람이었다. 독박 육아에 지친 영희보다 더 어리고, 신혼이고, 더군다나 유치원 교사였던 해영이 더 상냥하게 느껴졌던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 손을 더 오래 탔더라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만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힘이 대단했다.
해영은 많은 걸 알려줬다. 낙엽으로 왕관을 만드는 법도, 콩밥을 꾹 참고 먹는 법도, 누군가를 자신보다 사랑하는 법도 모두 그가 알려줬다. 딱 한 번 해영을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가 밥상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무심결에 엄마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당황한 그 순간을 강렬하게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해영을 영희보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왈칵 들켜버린 것이 부끄러웠다.
캠코더에 찍힌 어린 시절에는 늘 해영이 있다. 나를 먹이고 놀아주는 와중에 영상도 찍느라 바쁘다. 젊고 애처롭다. 그에게 돌봄이란 무엇이었을까? 해영의 마음이 궁금한 이유는 그가 먹이고 길러낸 아이가 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파수꾼적 면모는 우리가 그의 곁을 떠나 멀리 이사한 이후로 계속 넓어졌다. 그는 뒤이어 자식 셋과 조카 둘을 기르고, 교회 어린이들의 선생님이자 동네 아이들의 이모가 되었다. 돌봄의 최전선에서 해영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점점 더 성숙한 모습이 되어갔다.
해영은 첫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또래와의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린 적당히 어색하고 사이좋은 이모와 조카가 되었다. 비로소 영희와의 관계도 둘만의 것이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해영과 달리 영희에겐 시시콜콜 다 말해줘야 했다. 그가 일방적으로 나를 이해해 주어야 하는 책임감을 느끼는 데 비해, 온전히 마음을 내비치는 일은 내게 어려웠다. 알고 싶은 마음과 알려주기 싫은 마음이 오랫동안 그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우리의 다름이 해영을 통해 통역되고 옅어져 왔기 때문에, 셋이 아닌 둘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다뤄져야 했다.
해영이 영희에게 말했다. 왜 애 마음을 몰라줘? 딱 보면 알겠던데. 둘의 이야기를 엿들을 때마다 쾌감을 느꼈다. 영희가 바로 마음을 알아차렸으면 하는 욕망을 해영은 말 한마디로 풀어줬다. 몇 년 만에 그의 집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공백에도 내가 좋아할 음식을, 간식을, 장소를 계속 꺼내주고 데려다줬다. 영희와 십 년 넘게 공유한 취향을 해영은 금방 알아차렸다. 심지어 영희의 취향, 몸과 마음조차 곁에 있는 나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관계의 빈 곳을 완벽히 메꿔주는 그 손길에 어떻게 기대지 않을 수 있을까. 도망치고 싶은 날이면 그가 어린 나의 배를 토닥거리던 순간이 생각난다. 그 시간을 지나왔어도 이미 몸에 달라붙은 돌봄의 기운 때문에 나는 여전히 해영을 두 번째 엄마처럼 여긴다.
영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사랑을 주려고 애썼고 나는 그것을 빌미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열일곱의 나는 인생의 부분마다 잇자국을 남긴 이들을 방치한 스스로가 화났고, 잊으라는 영희의 말이 지긋지긋했다. 그가 내게 했던 십여 년 전의 말들, 편이 되어주지 않은 순간들을 전시해 끝도 없이 사과를 요구했다. 사실 여부를 따질 수도 없는 것들을 지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 지리멸렬한 폭발의 시간을 지나 관계의 끝장을 본 이후에야 그 마음이 잦아들었다. 영희와 나의 다름은 목이 쉴 때까지 말하고 부딪히고 나서야 둔해지는 종류였다. 우린 가장 원망하기 쉬운 대상인 엄마와 자신과 너무 다른 딸이라는 서로의 우상을 깨뜨려야 했다. 그토록 싸움을 걸던 내가 부끄러워질 무렵 영희가 보였다. 나는 그를 탓하며 계속 선명해지는데 그동안 영희는 빛이 희미해지고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정작 영희를 몰랐다. 표현하고, 궁금해하고, 물어보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다. 나만의 슬픔에 골몰하며 가장 쉬운 대상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해영은 일상의 어려움을 척척 손보면서 잘 지내리라 확신하면서, 영희는 애처롭고 신경 쓰인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전화를 걸어 묻는다. 엄마 뭐 해?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머니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매번 다른 답이 흘러나온다. 나는 영희의 엄마가 된 것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듣는다. 할 말이 끝난 영희에게서 질문이 되돌아온다. 재밌는 일은 없었어? 밥은 먹었고? 이번 주는 집에 올 거야? 여전히 나를 궁금해한다. 그렇게 실망하고 화를 내도 금방 돌아오라고 말해준다. 그래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나도 사랑을 말한다는 것. 계속 궁금해한다는 것. 그의 변해가는 몸을 꼭 안아준다는 것.
해가 갈수록 영희와 해영의 손은 조금 더 두툼해지고, 등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부풀어 올라간다. 그 손으로 밥을 먹이고, 등을 토닥이고, 자신보다 커버린 존재를 안는다. 엄마와 이모의 가장 물렁물렁하고 둥근 몸이 나의 뼈대라는 걸 그들의 품 안에서 실감한다. 그 모습이 사랑이 마르지 않는 인간의 훈장처럼 느껴진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결국에는 품는, 자신을 뛰어넘는 사랑의 모습을 바라본다.
내가 아는 영희와 해영의 공통점은 사랑이 많다는 것. 그 많은 사랑을 주고도 둘 안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는 것. 늘 누군가를 돌보는 해영이나, 사과하라는 수백 번의 억지에도 수백 번 답해주는 영희나 이제는 비슷해 보인다. 오히려 나의 모습이 점점 달라진다. 그들이 알 수 없는 모습이 계속 생긴다. 둘은 이 관계를 맨 먼저 떠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마다 우리 관계의 모양은 둔각, 예각, 직각을 오고 간다. 이젠 일관된 모습 없이 돌봄을 서로 주고받는다.
유년기의 세상은 어둑한 새벽 같다. 약이 다 되어 투명해진 형광등 불빛과 한낮의 열이 식은 바닥, 새우잠 자는 엄마의 등과 해영의 집 거실에서 먹던 밥. 태어나서 만나는 모든 것이 어색하던 시절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제 내가 마주치는 세상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는데, 영희가 앉아 있을 거실도 그럴까. 해영의 일터는 또 어떨까. 그들이 없는 나만큼 내가 없는 그들의 삶을 알 수가 없다.
나는 해영과 영희 사이에서 무릎을 베고 누워있다. 둘이 종알거리며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다 까무룩 잠이 든다. 꿈속에서 나는 해영이 되었다가, 영희가 되었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에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 그들을 영원히 그리워할 날이 와도 내 안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싶어서, 그 믿음을 조리개처럼 풀고 열기를 반복하며 세상을 이해해 보려고 애쓴다.
하자글방 4주차 글감 '내게 깃든 타인들'
나의 몸과 마음을 이루고 형성한 타인에 관해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