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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고향의 상관관계

15년 만에 고향에 간다. 기억 속에만 남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왠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지 않았다. 익숙한 지명이 쓰여 있는 낯선 역사에 내려 주변을 살핀다. 해영은 1층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이가 한 자리 숫자이던 때 이후로 그가 나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오랜만이다. 조금씩 물드는 하늘을 두고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간다. 해영과 나는 아직 어색하지만 나는 금방 그의 첫째 딸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어디를 가고 싶은지, 이제 무엇을 할 건지 자꾸 조잘거린다.

고향에 가는 것보다 해영의 집으로 향하는 게 더 떨려서 자꾸 어디인지 물어본다. 집은 공항과 코스트코 근방에 있다. 이제 그가 사는 동네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풀이 죽는다.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도 내내 모르는 것들뿐이다. 집에 머무는 동안 해영은 나를 코스트코로 데려가 오백 그램이 넘는 소금과 조금 더 무거운 초콜릿 묶음을 사준다. 아침에 짭짤한 초콜릿을 먹고, 그가 알려준 도서관과 미술관으로 향한다. 비가 쏟아져서 허벅지까지 바지가 젖어 들지만 우산 손잡이를 더 위로 고쳐 잡으면서 걷는다. 온통 허옇게 칠한 미술관을 나와 붉은 락카칠이 뒤덮인 재개발 구역으로 넘어간다.

철 거 위 험 철 거 위 험

비가 언덕을 따라 굴러떨어지고 샌들로 들어찬 빗물 때문에 발이 미끄러진다. 빗소리가 강해서 1톤 트럭의 경적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듯 먹먹하다.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걷는다. 눈이 따가울 만큼 선명한 곳이 아니라, 이제 다 없어질 것들을 마주친다. 박살 나고 사라질 것들 사이에서 한참 비를 맞는다. 언덕을 오르다가 뒤를 돌 때마다 모르는 풍경이 펼쳐진다. 문득 나는 고향을 보고 싶어서 여기로 온 건지 궁금해진다. 차라리 사라졌다면 좋았을 걸. 미끄러지지 않도록 언덕을 내려오는 데에 한참이 걸린다. 다음 날은 해영과 정말 고향에 가는 날이다. 온통 뻘건 글씨가 씌워진 누군가의 고향을 보면서 내 고향도 차라리 그러길 바란다. 전부 달라져서 그리워할 수도 없게 만들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속에서 출렁거린다.

그늘진 놀이터의 서늘함, 수업 시간 학교 뒤뜰에서 느끼는 고요함, 갈림길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 눈물을 털어내고서야 괜찮아지는 모든 처음을 낱낱이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리 털어내도 고향을 그리워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잊어야 더 좋은 것도 있다지만 나의 온갖 처음들이 고향에 있어서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직장에 가서 텅 빈 마을에는 장을 보러 나온 할머니들이 모여 있다. 나물을 파는 할머니나 사는 할머니나 나물에는 관심 없고 앉아 수다를 떤다. 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변하지 않은 것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재개발 구역에서 읊조리던 차라리 전부 달라지길 바라던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늘 걷는 길처럼 고향을 산책한다.

8살이 된 것처럼 동네의 온갖 놀이터를 들어간다. 만화 가판대를 꺼내고 문을 여는 문방구 아저씨를 구경한다. 소똥 냄새가 나는 등굣길을 걷는다. 가을이 되면 거짓말처럼 불쑥 솟아나 있던 해바라기밭도 여전히 여기 있다. 없어진 것들도 분명히 여기 있다.

마을은 생각보다 컸다. 보통 어릴 때 살던 곳에 가면 더 작아 보인다고 하던데. 나는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어지러울 때까지 산책한다. 걸을 때마다 온통 아는 것 투성이여서 사진을 찍고 들어가 보느라 하루를 꼬박 보낸다. 걸을수록 어린 나를 이루던 것들이 여전히 큰 자리를 차지한다고 느낀다. 어디서 꺾어야 하고 어디쯤 무엇이 있는지 두 다리에 박힌 익숙함이 본능적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기는 저기가 되지 않는다. 고향은 영원히 ‘여기’로 남을 것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과 너무 멀어졌다는 사실이 슬펐던 적이 있다. 지도 거리뷰로 혹시 아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봤던 길을 보고 또 봤다. 그렇다고 온전히 가질 수도 없는 거였다. 하지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외로움은 상태가 아니라 장소일 수도 있다는 것. 모두가 외로운 순간에는 내가 유일한 나의 고향이 된다는 것. 조금씩 느끼고 나니 고향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을 보는 일은 사람을 속절없이 물렁하게 만들어 버린다. 뙤약볕에 땀을 닦는 척 눈을 문지른다. 난 곳이 아니라 사는 곳을 사랑해 보고 싶다면서 실은 안 그랬다. 사는 곳은 계속 모르고 고향은 잘 아는 곳이었으면 했다. 둘 다 다르게 좋아할 수 있는 걸 알아도 꿋꿋이 편애했다. 모르는 길은 탐방이고 산책은 나만의 나와바리를 여며가는 일이다. 불쑥 두고 와 버린 기억 덩어리들이 아쉽고 눈에 밟혀서. 그렇게 걸으면서도 이건 산책이 아니라며 고집했다. 15년 동안 내게 필요했던 한 번의 경험은 더는 아쉽지 않을 만큼 고향을 산책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골목보다 늘 걷는 길이 좋다. 고백하건대 몇 년에 걸쳐 구성한 나만의 산책길이 좋다. 초록 잎들이 보이고 사람은 적은 길에 닿은 수천 번의 발자국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간다. 바닥에 핀 민들레를 여전히 반가워하는 마음이 좋다. 그 익숙함을 살풋 안고, 가까이서 보면 더 좋은 것들과 걷는다. 능소화가 피고 떨어지고 낙엽이 우거지는 길에 매번 멈춰 서서 바라본다. 늘 그대로 있는 것들과 불쑥 없어지는 것들, 점차 바뀌어 가는 것들을 언제까지나 보고 싶다. 담장 높은 주택의 덩굴이 바람에 쓸려 찢기고 꿰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언덕을 내려오고 싶다. 최초의 산책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껏 두리번거리면서.

하자글방 2주차 글감 '산책 연습'

산보하며 발견한 것들에서 출발하기